효월의 종언 못다 한 이야기

「어느 수렵제에서」

툴라이욜라 연왕국의 무왕 우크라마트는 눈 아래로 펼쳐진 거리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노을이 비치는 거리에는 참으로 다양한 종족의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이곳에 새로운 얼굴이 더해졌다. 야술라니 황야에서 온 귀환자들이다. 국소적인 세계 통합에 휘말려, 단절된 반구 안에 남겨져 버린 그들은 신생 알렉산드리아 연왕국의 통치 아래서 전혀 다른 문화에 힘들게 적응하며 30여 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바깥’으로 통행할 수 있는 길이 열려 모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지만, 세대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단절되어 버린 현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들을 어떻게 받아들여 공생의 길을 걸을 것인가? 여러 대책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는데, 그중 하나로 지금 툴라이욜라에서는 수렵제 개최를 검토 중이었다. 각종 행사를 좋아했던 선왕 굴루쟈쟈가 특히나 선호하던 축제인 수렵제를 열어, 사람들이 교류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내가 처음 수렵제에 참가했던 게 16살 때였나…… 아니다, 분명 그 전에 아빠 몰래 구경하러 간 적이 있었지.” 우크라마트는 그리움에 가슴이 미어져,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것은 14년 전의 일이었다. 왕궁 앞 솜깃 광장에는 날카로운 눈빛을 한 수십 명의 강자들이 모여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과 기대감이 감도는 가운데 연왕 굴루쟈쟈가 난간으로 나왔다. 먼저 입을 연 쪽은 대담한 성격으로 알려진 무예의 머리였다. “다들, 모여주어 고맙다! 잘 들어라. 수렵제라는 건 그저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다! 사냥이 생명을 빼앗는 행위가 아닌, 생명을 이어주는 행위라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주고 자연에 감사하기 위한 자리다!” 그의 말이 참가자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이어서 이지의 머리가 지적인 목소리로 축제의 규칙을 설명했다. 참가자들은 제한 시간 내에 굴루쟈쟈 개선문에서 거리로 풀려난 마물을 사냥해야 하며, 가장 큰 사냥감을 사냥한 사람에게 우승자의 명예와 ‘원하는 상품’이 내려진다는 것. 예를 들어 지난 수렵제의 우승자였던 슈발라족 족장 훈무루크는 보물창고에 있던 대궁을 원했고, 그것을 마을로 가져가 일족의 영웅이 되었다. 그만큼 명예로운 경기이기도 한 것이다. 무왕 굴루쟈쟈가 큰 소리로 개최를 선언하자, 큰북 소리가 울려 퍼지고 참가자들이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거리로 달려 나갔다. 마치 폭풍우 같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무예의 머리가 문득 중얼거렸다. “참가자 대부분은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부족 출신들이다. 내 아들이 그런 강자들을 물리치고 성과를 올릴 수 있을까?” 그 말에 이지의 머리가 기가 차다는 듯이 대답했다. “조라쟈라면 걱정할 필요 없겠죠. 그 아이는 13살에 어엿한 한 사람의 전사니까요. 당신도 그걸 잘 알고 있기에 참가를 승인한 것 아닙니까?” 쌍두는 같은 몸을 공유하고 있어도 제각기 다른 인격을 가진다. 무예의 머리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이지의 머리의 의견을 듣고, 안심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용연대 대원이 심각한 얼굴로 달려왔다. “보, 보고드립니다! 우크라마트 왕녀님이 방에서 빠져나가 행적을 감추셨습니다. 이왕님 분부대로 방문을 철저히 잠가 두었습니다만……” 보고를 들은 이지의 머리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한숨을 쉬자, 그 옆에서 무예의 머리가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하하! 수렵제가 궁금해 몸이 근질근질했던 모양이군. 내 딸이지만 장래가 정말 기대되는구나.” 한편, 문제의 왕녀 우크라마트는 수많은 노점이 늘어선 바닷새떼 시장의 한구석에 있었다. 그녀는 작은 몸을 둥글게 말고 층층이 쌓인 상자의 그림자 뒤에 숨어서, 두 귀를 세운 채 주변 상황을 살펴보고 있었다. 수렵제 참가는 허용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축제 분위기를 직접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곧 눈앞에 펼쳐질 진짜 전투를 상상하자, 그녀의 심장은 걷잡을 수 없는 흥분에 저 멀리서 들려오는 큰북 소리보다 빠르게 요동쳤다. “야, 어린애가 이런 데 있으면 위험해.” 어느샌가 상자들 사이에서 몸을 내밀고 있던 우크라마트는 갑작스레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외투를 걸친 사람이 서 있었다. 밤바다처럼 출렁이는 검은 머리칼과 쫑긋 솟은 긴 귀, 가느다란 눈매에 별빛 눈동자가 반짝이는, 그 사람은 우크라마트가 처음으로 만난 셔토나족 소녀였다. “뭐야, 그러는 언니도 어린애면서! 무서우면 얼른 연왕궁으로 피하든가!” 살짝 울컥한 우크라마트가 맞받아쳤지만, 소녀는 아무 표정 변화도 없이 대답했다. “그럴 순 없지. 난 수렵제를 보려고 일부러 야술라니 황야에서 왔단 말이야. 연왕궁에서 멀찍이 바라만 봐서는 사냥 분위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없다고.” 아무래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부모님 몰래 구경하러 온 것 같아서, 우크라마트는 무심코 미소를 지었다. “나랑 같은 처지인가 보네! 그럼 있잖아, 나랑 같이……” 생각지도 못한 공통점을 알아낸 우크라마트는 소녀에게 같이 다니자고 하려 했지만, 말을 더 이을 수가 없었다. 사냥감으로 풀어놓은 듯한 새가 이쪽을 향해 천천히 날아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저 새는 뭐야!?” 우크라마트가 큰 소리로 말하며 새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셔토나족 소녀는 뒤를 돌아보고는 애써 냉정히 대답했다. “투칼리브리…… 평소에는 꽃꿀을 빨아먹는 무해한 새인데, 방심은 금물이야. 흥분하면 저 무식하게 큰 부리를 휘둘러서 눈에 보이는 건 모조리 다 박살 내버린다고 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야생의 짐승이 내뿜는 박력 앞에 우크라마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귀가 찢어질 듯한 괴성을 내지르는 새는 누가 봐도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우크라마트는 상자 옆에 세워둔 도끼를 집어 들고는 힘차게 외쳤다. “언니는 내가 지켜줄게!” 우크라마트는 말을 마치자마자 투칼리브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전법이고 뭐고 없었다. 그저 정신없이 돌진해, 도끼를 들어 올리고는…… 온 힘을 다해 내리쳤다. 그 직후, 사방으로 불꽃이 튄 것은 도끼가 새를 명중시키지 못하고 돌바닥을 내려찍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투칼리브리는 요란한 소리와 불꽃에 놀라 날아가 버렸다. 살았다…… 그 생각에 안도하자마자 힘이 빠진 우크라마트는 무릎이 꺾여 주저앉았다. 다리가 조금씩 떨리고 있다. 처음 겪어본 실전에, 그제야 공포심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셔토나족 소녀는 살며시 우크라마트에게 다가와 손을 뻗었다. “……몸은 작은데 꽤 세구나. 하지만 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이 틈에 연왕궁으로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내민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킨 우크라마트는 소녀와 둘이서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주변을 경계하며 언덕길 오르기를 몇 분…… 마침내 연왕궁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눈에 들어오자, 긴장이 풀린 두 사람은 자신들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안도하는 것도 잠시, 등 뒤에서 다가오는 묵직한 발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말처럼 자라난 갈기에, 이상하게 발달한 창 모양의 송곳니…… 틀림없어, 자그날이야. 저런 녀석까지 풀어놓다니!” 셔토나족 소녀의 목소리에 서린 긴장감을 알아채지 못하더라도, 위험한 상대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우크라마트는 반사적으로 도끼를 거머쥐었다. “그만둬. 저건 투칼리브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녀석이야. 숙련된 사냥꾼이 떼로 달려들어도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 죽든 살든 지금은 도망가는 수밖에 없어!” 하지만 우크라마트는 물러서지 않고, 소녀와 마물 사이에 서서 외쳤다. “나도 알아! 그러니 내가 시간을 끌게! 언니는 도망쳐!” 처음 만난 소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 그것은 우크라마트에게 있어 이성적 판단을 뛰어넘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셔토나족 소녀 또한 어린 우크라마트를 두고 도망치지 않았다. 다리가 얼어붙을 정도로 공포스러웠고, 스승인 어머니로부터 위험한 상황에서 도망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배워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처음 만난 자신을 온 힘을 다해 지켜주려는 이 바보 같은 아이를 내버려둘 수도 없는―― 이런 성격 또한 함께 물려받았다. 하지만 마물은 그런 그들의 마음 따위 알 바 아니란 듯이, 발굽으로 돌바닥을 박차며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다. 그런데 그때, 바람을 가르며 날아온 돌멩이가 마물의 이마에 정확히 명중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이야, 라마티. 뛰어!”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공격을 받은 자그날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시선 끝에는, 계단 위에 서서 가죽 새총을 꺼내든 헤이자알로족 소년이 있었다. “쿼나 오빠!” 우크라마트는 셔토나족 소녀의 손을 붙잡고 계단을 향해 부리나케 달렸다. 그 사이에도 돌멩이가 두 발, 세 발 날아들었고 차례차례 자그날에게 명중했다. 하지만 소년의 완력으로 쏘는 돌의 위력이라고 해 봤자 뻔했다. 잠시의 혼란을 벗어난 마물은 포효하며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따라잡힐 거야!” 셔토나족 소녀의 초조함 섞인 외침에 우크라마트는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따라잡히기 전에 적어도 셔토나족 소녀만큼은 대피시키겠어. 우크라마트는 계단까지 얼마 남지 않은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그 자리를 떠나듯 내달리기 시작했다. 우크라마트의 움직임에 낚인 자그날이 그녀의 뒤를 쫓았다. 등 뒤에서 셔토나족 소녀의 책망 어린 목소리가 들렸지만, 우크라마트는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해서 달렸다. 조금이라도 셔토나족 소녀에게서 멀어져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도 못하고 다리가 꼬여 넘어지고 말았다. 점점 가까워지는 자그날을 보며 우크라마트는 죽음을 각오했지만, 이상하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뒤돌아보니, 그곳엔 고깃덩이가 되어 뒹굴고 있는 자그날과, 검 한 자루를 손에 쥔 푸른 비늘 마무쟈족의 뒷모습이 보였다. 후비고족의 강인한 육체와 부네와족의 푸른 비늘을 물려받은 유일한 존재이자 툴라이욜라 연왕국의 제1왕자인 조라쟈. 그의 용모야말로 우크라마트와 쿼나가 아무리 원해도 가질 수 없는, 굴루쟈쟈의 혈육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번 수렵제에 역사상 최연소의 나이로 참가한 우크라마트의 의붓오빠는, 단 일격으로 자그날의 목덜미에 있는 급소를 베어 의붓동생과 낯선 소녀를 구한 것이다. “별것도 아니군……. 가자. 쿼나, 우크라마트.” 이렇게 우크라마트의 작은 모험은 끝이 났고, 수렵제도 막을 내렸다. 결과는 조라쟈의 압승이었다. 그가 원한 포상은 또 한 자루의 검으로, 그것은 아버지와 같은 바이퍼의 전투술을 터득하겠다는 그의 각오와 결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1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명예로운 승리를 거머쥔 왕자를 보고, 툴라이욜라의 백성들은 저마다 ‘기적의 아이’라 칭송하며, 언젠가 위대한 연왕의 뒤를 이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위풍당당한 모습에 감명을 받은 건 민중만이 아니었다. 같은 아버지의 자식인 우크라마트와 쿼나 역시 형제의 승리를 진심으로 축하하며, 자신들을 구하러 온 위용 넘치는 모습을 가슴속 깊이 새겨두었다.

“……야, 내 말 안 들려?” 누군가의 목소리에 우크라마트는 눈을 뜨고 추억 속에서 빠져나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소꿉친구인 에렌빌이 서 있었다. “수렵제에 쓸 마물을 골라 달라고 사람 부른 게 누구시더라?” 그는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표정을 띠고는 항의했다. “미안, 미안. 처음 수렵제를 구경했던 날이 떠올랐거든. 조라쟈 오빠가 우승했을 때 말이야……” “아아……” 그날은 에렌빌의 기억에도 남아 있는 모양인지,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14년 전의 일을 떠올리는 듯했다. 왕궁을 빠져나온 우크라마트처럼, 어머니께 한 맹세를 어기고 펼쳤던 짧은 모험을……. “난 그때 네가 엄청 예쁜 셔토나족 언니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땐 뭐 틀린 것도 아니었지.” 일반적으로 셔토나족의 성별은 13살에서 15살 사이의 성징기에 확정된다고 한다. 이 사실이 딱히 비밀인 것은 아니지만, 다른 부족 중에는 모르는 자도 태반이다. 그렇지 않아도 셔토나족은 인구가 적은 데다 수명이 길기 때문에, 유년기의 그들을 마주칠 기회가 드물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진짜 놀라긴 했지만, 넌 언제나 내 최고의 소꿉친구야!” 언제나처럼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우크라마트를 보고 에렌빌은 황당하다는 듯한, 하지만 어딘가 다정한 미소를 보였다. 그러고는 지금까지 수십 번은 반복되어 온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진다. “아니, 그냥 옛날부터 아는 사이일 뿐이야. 자, 가자…… 수렵제를 성공시킨다며.” 우크라마트는 씩씩하게 대답하며, 추억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한때 손을 맞잡고 도망쳤던 그 길을, 지금은 나란히 걸어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