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에 떠 있는 이름 모를 요마의 영역을 백은의 갑옷을 입은 반요――제로가 나아간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건축물이 겹겹이 포개어진 난잡한 광경으로 봤을 때, 이 영역의 주인은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일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예상대로 가는 곳곳마다 그 앞을 막아서는 요마 무리는 하나같이 인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끝없는 굶주림에 쫓기는 것처럼 에테르를 먹어 치우려 덤벼들었다. “이야기를 나누러 온 거지만…… 말이 안 통한다면 어쩔 수 없지. 검을 다루는 건 오랜만이라 봐주지는 못한다.” 말과는 달리 제로는 공격해 오는 요마들을 화려한 검술로 차례차례 쓰러뜨린다. 그리고 유달리 큰 마지막 개체를 물리친 후, 잠시 시간을 두고 검을 집어넣었다. “방금 그 녀석이 이 영역의 주인이었나 보군.” 그러자 숨어서 전투를 지켜보던 사역마 뇌켄이 둥실거리며 다가온다. 얼마 전에 이계의 친구가 소환해 준 제로의 새 길동무다. ‘보이드’라 불리는 이 세계에서는 드물게도 어둠 속 이형인 요마가 아닌 존재로, 제로가 조금씩 나눠 주는 에테르 덕분에 소멸하지 않은 채 활동하고 있다. 안전을 확보한 줄 알았던 찰나, 땅에서 갑자기 검은 에테르가 떠오르더니 포악한 요마의 모습으로 변하여 뇌켄을 뒤덮었다. “아직 남아 있었나……!” 제로가 다시 검을 뽑으려고 한 순간, 굉음과 함께 떨어진 벼락이 요마를 불살랐다. “방심하지 마라, 제로.” 손끝에 번개 마법을 쓴 흔적을 남긴 채, 검은 갑주로 몸을 감싼 거구의 요마――골베자가 다가온다. 제로의 또 다른 길동무, 아니, ‘동료’다. “신세를 졌군, 골베자.” 골베자는 제로의 말을 듣고 고개를 한 번 까딱인다. 이제는 그것만으로도 뜻이 통하다니 신기한 일이다. “이쪽은 헛수고였다. 이 영역에 멀쩡히 이야기를 나눌 만한 지능을 가진 요마는 없는 모양이군.” 그렇게 말한 골베자는 팔을 뻗어 쓰러진 요마에게서 흩어져 가는 에테르를 흡수하기 시작한다. 골베자도 요마이므로, 그 갑주 안에 있는 것은 이미 인간의 몸이 아니었다. 따라서 쓰러뜨린 상대의 에테르를 섭취하지 않으면 힘을 유지할 수 없다. 그것이 이곳 보이드의 섭리인 것인데……. 골베자는 문득 어떤 사실을 깨닫고, 그 손을 멈췄다. “제로, 너는 먹지 않는 건가?” “그래, 나는 요마를 먹지 않는다. 허공에 떠다니는 희미한 에테르를 필요한 만큼만 보급하면 충분해.” “다른 요마를 먹지 않고도 그렇게 큰 힘을 손에 넣었다는 말인가? 이 세계의 이치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군. 대체 어떠한 사정이 있는 거지?” “영혼이 섞이는 그 감각을 싫어하거든. 나는…… 그걸 견딜 수가 없다.” “……그렇다면 먹은 적은 있다는 뜻이군?” 제로는 그 질문에 답하는 대신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예전처럼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면 모자챙으로 눈을 가렸으리라. 이윽고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고, 머나먼 과거의 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제로의 어머니는 환마라 불리는 요괴에 맞서 싸우며 그 힘을 봉인하는 자――‘메모리아술사’였다. 그러나 전투 중 강한 어둠에 노출되는 바람에 뱃속에 있던 아이, 훗날 제로라고 불리게 되는 아기는 반요로 태어났다. 어머니에 관한 기억은 단 하나, 자기 전에 한 영웅담을 이야기해 줬던 것뿐이다. 세계가 어둠에 삼켜졌을 때, 어디선가 나타난 영웅 ‘제로무스’가 세계에 빛을 되찾아 주었다는 이야기. 어렸던 제로도 그 이야기가 공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는 마음속 깊숙이 새겨져 사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어머니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의 얼굴조차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뒤에도, 제로는 그 이야기만큼은 잊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이야기처럼은 흘러가지 않는다. 환마를 전부 무찔렀지만 사람들은 행복한 일상을 손에 넣지 못했고, 새로운 싸움이 시작되고 만 것이다. 세계를 구한 전사들은 그들이 손에 넣은 환마의 힘에 취해 ‘어둠의 메모리아술사’가 되었고, 선한 마음을 지켜낸 소수의 ‘빛의 메모리아술사’와 싸움을 벌였다. 장성한 제로가 어머니처럼 검을 들고 여행을 떠난 이유는, 공을 세우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이 세계에는 빛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 그러나 어둠의 메모리아술사들은 강한 데다 교활했으며, 무엇보다 머릿수가 많았다. 그들과 맞서 싸우려면 동료가 필요했지만, 제로는 도무지 남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 아무리 사이좋았던 친구라도 자신이 반요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돌연히 입을 다물고는, 외면하는 것도 모자라 돌까지 던졌던 기억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 도중에 만난 기사가 합류를 권유했을 때도 의심하고 경계하는 마음이 앞서고 말았다. “그때 내민 손을 잡았더라면…… 내게 더 강한 힘이 있다면……!” 어둠의 메모리아술사들과 싸웠지만 수적 열세에 몰려 패배했고, 속절없이 쓰러져 있었을 때…… 세계가 무너졌다. 후세에서 일컫는 ‘어둠의 범람’이 일어난 것이다. 별빛이 하늘에서 사라지고, 어두운 장막이 모든 것을 감쌌다. 다만 제로가 대부분의 사람과 달랐던 점은, 어둠의 격류가 세계를 파괴했을 때 차원의 벽에 생긴 균열에 떨어져 ‘틈새’로 나갔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마치 영원과도 같은 긴 시간을 표류하게 되었지만, 덕분에 제로는 어둠의 범람에 의한 영향을 받지 않았고…… 이윽고 우발적으로 생겨난 구멍을 통해, 반요인 채로 귀환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제로가 목격한 것은 모든 것이 파괴된 고향의 모습이었다. 대지는 부패했고, 그 대신 어둠을 응축한 일그러진 섬이 허공에 떠 있었다. 살아있는 동물은 없었고, 식물마저 어둠에 삼켜져서 요마로 변한 상태였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살 만한 환경은 아니었다. 피폐해진 몸을 이끌며 진창에 발이 빠지지 않도록 느린 발걸음으로 주변을 탐색하던 제로는 점차 체념하기 시작했다――이미 인간은 전부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닌가 하고. 바로 그때, 어떤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듣는 소리, 목소리였다. “거, 기…… 누구 없어……? 도와, 줘……!” 그 순간 제로는 이미 질풍처럼 달려 나가고 있었다. 검도 방패도 없다. 싸울 힘은 당연히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누군가 살아 있고 도움을 요청한다면…… 가만히 있을 이유는 없다. “어디지, 어디 있나? ……제발 대답해!” “여기야……!”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 것과 동시에 거대한 발톱이 덮쳤다. 제로는 간발의 차로 몸을 비틀어 일격을 피했다. 뒤돌아보자 요마 한 마리가 비열한 미소를 띤 채 서 있었다. 아니, 미소를 띠었다고 느낀 건 목소리의 울림이 빚은 착각이다. 그 요마의 얼굴에는 눈도 코도 없었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엿보이는 입만 덩그러니 달려 있었다. “별일이군…… 이 끝나버린 세계에서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는 자가 있다니.” 제로는 그 말을 듣고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단박에 깨달았다. 이제,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는 존재는 반요인 자신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어디서든 나는 혼자라는 뜻인가…….” “마침 배고프던 차에 딱 좋은 사냥감이 나타났군. 최강이 되기 위해…… 네놈의 에테르를 먹어 치우겠다……!” 요마가 포효와 함께 휘두르는 날카로운 발톱을, 제로는 아슬아슬하게 피한다. 맨손으로 상대하기에는 너무 강한 상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도망치자는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세계가 끝나버렸다고 해도…… 아니, 세계가 끝나버렸기에 더더욱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 제로가 굳게 다짐하자 주변에 있던 어둠이 소용돌이치며 모이기 시작하더니, 마치 그 의지에 호응하는 것처럼 낫의 형태를 이루어 손안에 들어왔다. 제로는 신비한 현상에 놀라면서도 낫을 그러쥐고 요마를 향해 뛰어올라,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회전하며 일격을 가한다. 공격을 받은 요마는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두 동강이 났다. 습격자는 쓰러뜨렸지만, 제로는 그대로 꼴사납게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오랫동안 표류한 탓에 체력이 한계에 달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나도…… 에테르를 섭취해야겠군…….” 반요로서의 본능이 이끈 것인지, 제로는 흩어진 에테르를 그러모아 섭취했다. 체력이 천천히 회복되는 것이 느껴지는 정도가 아니라, 예전보다 힘이 용솟음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것이 에테르를 섭취한다는 것이군, 그 힘을 찬찬히 곱씹어 보던 와중에 갑작스레 맹렬한 혐오감이 차올랐다. 현기증과 두통이 뒤섞여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어 간다. 몸이 무언가를 강렬히 거부하는 듯했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제로의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더욱더, 더 많이 먹어 치워라……! 모든 것을 집어삼키면 나는…… 우리는 최강이 될 수 있다……!’ “말도 안 돼, 너, 는……!?” 이미 산산이 흩어졌을 요마의 목소리가 제로의 의식을 괴롭힌다. 마치 영혼을 침식당한 것처럼, 깊이 스며들어 떨쳐낼 수가 없다. 아무래도 이 세계에서 사라진 것은 과거의 모습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죽음에 의해 에테르가 환원되고 완전히 정화되어 다시 태어나는――그러한 생명의 순환조차 끊기고 만 것인지, 흩어진 요마의 영혼이 섭취한 자의 내면에 계속 남아 있다. 이러다가는 의식의 주도권마저 빼앗길 것이다. 저항해야 한다. ‘끈질기기는…… 네놈은 대체 어떻게 인격을 유지할 수 있는 거냐? 어디, 마음속을 좀 들여다볼까……?’ 내면의 요마가 의식을 파헤치자, 제로가 엄중히 봉인해 놓았던 여러 기억이 들추어지기 시작한다. 주위 사람들에게 소외당하는 소녀, 잊었다고 생각했던 어머니의 얼굴, 그리고……. ‘이건…… 석상인가? 대체 누구지? 왜 이런 게 마음 밑바닥에 잠들어 있는 거야……?’ 제로는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그러나 요마는 이미 그녀와 일체화되고 있다. 자신의 사고를 멈출 수는 없다. 그녀는 의문이 떠오르는 대로 내면을 속속들이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영웅이…… 제로무스처럼 사람들을 구하는 영웅이 되고 싶었다…….” 그러자 요마가 웃음을 터뜨린다. 필시 덩그러니 달린 입만으로 웃고 있으리라. ‘이거 아주 걸작인데……! 넌 그 영웅담이 어떻게 끝나는지 모르냐……!?’ 요마는 말한다. 제로무스는 세계를 구한 영웅이 되었지만, 지나치게 강한 그 힘 때문에 자신이 지킨 사람들에게 괴물 취급을 당하고, 결국 다시 어딘가로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 결말을 몰랐을까, 알면서도 반요인 딸에게는 숨겼던 걸까. 하지만 진실이 무엇이든, 그 말을 듣고도 제로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어…… 마음에 깃든 빛으로 세계를 구할 수 있다면…… 나는 홀로, 기꺼이 괴물이 되겠다!” 제로는 마음속으로 굳게 결심하고 잡념을 머릿속에서 떨쳐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의 소란이 거짓말처럼 잦아들고 그 요마의 목소리도 두 번 다시 들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의식의 주도권을 되찾은 모양이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내면을 드러내게 된 제로의 심경은 여전히 복잡했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군. 이 끝나버린 세계에서 대체 뭘 할 수 있다고…….” 그때부터 정처 없는 방랑이 시작되었다. 몇 번이나 요마의 습격을 받았지만, 요마를 해치우더라도 그 에테르는 절대 섭취하지 않았다. 때로는 굶주림 때문에 목숨을 잃기도 했지만, 죽음이 허용되지 않는 세계에서는 저절로 부활하므로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이 수천 년이나 이어지다 보면, 자신의 내면 같은 것은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녀는――
“나조차 잊고 있었는데…… 덕분에 생각났어.” 제로가 이야기를 끝맺자, 골베자는 담담하게 대답한다. “강력한 요마는 야심이 넘치기에 남을 먹어도 의식이 사라지지 않고 자아를 유지할 수 있다. 나 또한 그러하지. 하지만 너는 마음속에 남은 망설임으로 인해 허점을 찔렸던 모양이군.” 그것이 망설임 때문이었는지 생각한 뒤…… 제로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무력하고 고독한 내가, 그럼에도 영웅을 동경했다는 사실을…….” 제로는 문득 허공을 올려다보고는, 머나먼 하늘로 시선을 보냈다. “예전부터 궁금했다. 내 영역 한가운데에 있는 낯선 석상의 정체가 대체 무엇인지…… 그런데 이제야 알겠군. 괴물이라 매도당하면서도 세계를 구하려고 했던 제로무스. 그 영웅에게 품은 동경심이,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새겨져 있었던 거야.” 골베자는 감개에 젖은 제로를 흘끗 쳐다본 뒤, 발길을 돌린다. “그렇다면 나도 앞으로는 다른 요마를 먹지 말아야겠군. 세계를 구하겠다는 의지가 약해질 리는 없겠지만…… 지금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싶으니 말이다.” 그 말을 들은 제로는 약간 놀란 기색이었지만, 입꼬리만 살짝 올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계속 가지. 이 넓은 세계 어딘가에는 뜻이 같은 자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세계를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두 사람과 한 마리의 여행은, 이렇게 계속되어 간다.